고백하자면 하안중학교에 반 배정을 받을지,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갈 지에 대한 고민들을 부모님과 많이 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괴롭힘들로 인해서 많이 힘들었고, 당시 내가 좋아했던 사촌들. 삼촌이 살았던 용인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용인으로 이사가자고 했지만 당시 부동산 정책들로 인해서 이사는 불발되었고 하안중학교 반배정 고사를 치루게 되었다.
하안중에 입학하던 날, 내 옆에 있던 학생이 당시 sk 광고 음악인 부비디 바비디 부를 노래부르고 있었다. 두려웠다. 체형이 큰 학생이어서도 두려웠지만 작년의 트라우마들로 인해서 많이 두려웠고 무서웠다. 하지만 당시 담임선생님이었던 박수진 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셨고 그 분이 있었기에 용인으로 이사가고 싶다는 생각을 2년 정도 멈출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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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때 일산에서 친가댁 식구 결혼식이 있어서 간 기억이 난다. 그 날, 사촌들뿐만 아니라 당숙 가족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 최근 전쟁기념관에서 결혼식을 치룬 당숙 가족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날이기도 하다.) 일산 호수공원도 짧게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 두산과 SK와의 한국시리즈 야구경기를 처음으로 TV를 통해서 볼 수 있었다. 호수공원 근처 음식점에서 처음으로 보았는데 운동이 너무 재미없고 싫었지만 야구라는 종목은 정말 재미있게 내게 다가왔었다. 그 날 이후로 SK 와이번스의 팬이 되었다.
그 후 중학교 1학년 초기에 WBC가 치루어졌다. 3월 뜻이 맞는 친구들이 있어서 같이 WBC를 본 기억이 난다. 2년만에 다른 친구의 집에 가서 WBC 베네수엘라전 경기를 같이 보고 며칠 후 현승호. 김태원. 강정환. 윤령국. 김규동 등 8명의 친구들과 함께 야구를 한 번 해보자고 현승호와 함께 같이 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매우 내성적이었고 말도 거의 없었던 내게 그 시도는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었고, 야구라는 취미가 생기면서 20대 때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야구를 한다는 사실을 알자 당시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고 나와 지금도 지내는 내 친구가 중학생 시절 가장 은사라고 생각한 박수진 선생님은 야구 글러브를 사주겠다고 2층 교무실에서 말씀하셨다. 감사했지만 괜찮다고 했지만 중1 담임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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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7년까지는 공부를 했지만 2008년 7월부터 12월까지는 공부를 거의 손 놓았던 상태였고 과고준비반에 다녔기에 첫 시험을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전교에서 24등이라는 성적을 받게 되었다. 반에서는 4등이었다. ( 지금도 나와 친구인 주*은 반에서 2등을 했었다. 돌아보면 그 친구는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살아온 친구였고 나와는 달리 여전히 감정에 따라서 성격이 바뀌지 않는 강점을 지닌 친구인 것 같다.)
당시 국어 선생님이었고 나를 많이 챙겨주었던 장*화 선생님의 피드백을 듣고 정신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비록 과고를 준비중이었지만 과고에 떨어질 때도 대비해야했기에 내신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 당시 나는 많이 행복했었다. 박수진 선생님을 시작으로 김민경 선생님과 같이 많은 좋은 선생님들이 있었고 특히 경기과학고 이정현 선생님과 함께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기에 정말 그 분을 많이 따르고는 했었다. 비록 장난들이 심했어서 불편한 날들도 있었지만 좋은 친구들도 있었고 그 당시는 나 또한 평범한 14살 소년으로 살 수 있어서 좋았었다.
15살 때도 나는 평탄하게 살 수 있었다. 성적은 여전히 14등이었지만 과고를 준비했기에 4등만 더 올리자는 미션을 가지고 살았었다. 그 목표가 있어서 하루에 5시간만 자면서 과고 공부와 학업을 병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신기림. 허지원. 김정민과 같은 학우들을 많이 신용했고 학교 밖 친구들 중에서 경기도 영재원을 같이 다닌 후배들과 지내고는 했다. 하지만 평탄했던 삶에 큰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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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하게 큰 병을 겪게 되었다. 그 병은 내 삶을 많이 바꾸었고
결국 그 병으로 인해서 과고 입시를 포기하고 기숙사 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병으로 인해서 결국 비리를 저지른 경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문일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몸이 아픈 것을 티내고 싶지 않아서 친구들에게 비밀로 부쳤지만 몇몇 친구들은 눈치를 챘었다. ( 몸이 아프면 서러워서 그런지 그 당시 몇몇 학우들의 따뜻한 말들은 잊을 수가 없다.) 또한 고대구로병원 의사는 목을 숙이는 일을 하면 안 된다고 했었지만 교편을 일찍 내려놓으셨지만 당시 담임선생님이었던 김은희 선생님은 내게 포기하지 말자고 말씀하고는 1층 창고에 같이 가서 목이 최대한 안 아플 수 있도록 창고에서 여러 높이의 책상들을 꺼내고는 어떤 책상을 사용해야 내가 덜 목이 아플지 같이 고민해주셨다.
김은희 선생님, 차경주 선생님, 한문을 가르쳤던 정말 과분하게도 감사했던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고 방황을 15살 때에는 거의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과고 입시를 포기해야했지만 그 시간을 학교 공부에 투자할 수 있게 되어 지필 고사 성적은 7명 이내로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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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겪는 병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의원을 다니고 고대구로병원을 다니고 재활병원을 다녀도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러면서 16살이 되었다.
16살 때 청소년인권조례가 통과되며 학교 분위기 자체가 바뀌었다. 담임선생님인 황혜영 선생님은 선한 분. 마음이 따뜻한 분이었지만 강한 리더십을 지닌 분은 아니셨고 선생님도 어려운 일들이 많아서 선생님 자신조차도 힘들어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학급에서는 류상*, 김종*, 김동*, 최현*와 같은 소위 일진이라고 하던 학생들이 학생들을 서슴치 않게 괴롭혔다.
당시 나는 경기도 청소년인권조례를 모니터링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고, 광명시에서 청소년참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몸이 아팠지만 어른들과 함께 경기도 청소년인권조례를 모니터링하는 일은 보람있는 일이었고 주말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청소년시설. 청소년행사를 보면서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좋았었다. 두발. 복장보다는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스토리를 공유하자는 팀장님의 말씀에 많이 공감했고 그 분을 존경했었다. 또한 광명시에서 활동하면서 이은경 간사님. 광명시 청소년 정책을 총괄하는 공무원분을 알게 되었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으로 이상을 꿈꿀 수 있었다. 그러면서 사회 정의와 바른 삶을 살아가는 길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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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현*라는 반 일진 학생이 내 대둔부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찌르는 일이 발생했다. 2013년 초였는데 급식을 배급받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기억한다. 지금 돌아보면 장난이었겠지만 이전 글에 적었지만 과거 백승*이 압정과 같은 사물로 나를 찌른 기억이 나서 격분해서 16년 인생 처음으로 집 밖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 후 반 앞문을 교사(황혜영 선생님)가 보는 앞에서 부서버렸다.
그 날 이후 내 행동이 소문이 나서 소위 일진이라고 불린 학생들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머리를 때리거나 툭툭 치고는 했던 것이 일상이었고 돌아가는 길에 쓰레기를 치우던 일진 학생이 반항아라면서 빗자루로 나를 패기도 했었다. 심지어 당시 1학년이었던 동생도 나로 인해서 3학년 학생들이 있는 반으로 끌려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초6 때와는 다르게 과제를 대신 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했고 일진들의 협박을 해도 끝까지 참았었다.
( 너무 힘들고 고된 기억들이 많았지만 여기에는 적지 않겠다. )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성적은 42등대로 떨어졌고 몸이 아픈 상태였기에 방황은 더 심해졌다. 결국 나는 견디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광명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전부터 일진들의 잘못된 행동들에 대항하고 싶었고 행동으로 옮겼지만
그 대가를 감당하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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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배운 세상과 실제 세상은 너무 다르다는 것을 중학교 때 알게 되었다.
그리고 14살. 15살 때 친구들과 16살 때 친구들이 많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조직 분위기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같은 학생들이 있는 곳일지라도 학생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떤지에 따라서 학교 폭력의 빈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 예를 들면 내가 다닌 하안중은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는 학생들을 반마다 3명씩 고루 배치했었다. 하지만 면학 분위기가 좋은 반은 일진들이 3명이어도 그들이 영향을 끼치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대비해서 면학 분위가 좋지 않은 반은 일진들이 3명이었지만 그 일진들이 반을 통제하고는 했다.)
그러면서 느꼈다. 설령 어린 학생들로 구성된 학교조차도 분위기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환경이 조성되는데
사회에 악한 어른들이 분위기를 잡으면 선한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들어지거나 악함에 동조되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걸 문일고에서 나는 직접 겪고 체험하게 되었다.
- 두 번째 글: 10을 노력하면 8~11을 보상받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뜬구름일까? (2011~2014)
- 세 번째 글: 어렸을 적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 되어 살게 되었지만....... (20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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